두번째 잠수..T.-
..이거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금 잠수를 탈 계획이옵니다..;ㅁ;

한동안 그나마 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았고, 성공했으며, 그래서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너무 충만했던지 그 자신감이 오만함으로 바뀌어 갔고, 그래서 그런지 계속 실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T.T

물론 이런 실패를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생각하면, 전 사실 조금씩 저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태와 쓸데없는 생각으로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추상적일 뿐, 구체화 시키려고 하면 귀찮아서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이제 단순히 '슬럼프'나 '쉬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위기상황이라고 결정했습니다..-0-; 정신 못 차리면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잠시 또 잠수를 타려고 합니다..T.T 벌려놓기만 하고 수습못하고 또 다시 사라지는 것 같아 정말 죄송합니다;ㅁ; 두어달간 동안 자숙하며 또 공부하여서 다시 자신감을 되찾으면, 그때 다시 나타나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블로그는 잠시 폐쇄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T.T


하지만 역시 전 위기상황이 되어야 뭔가 하는 놈이라..ㅋㅋ; 곧 이 위기상황은 물러갈 것 같사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
by donzox | 2004/11/01 17:06 | 잡담(雜談) | 트랙백 | 덧글(0)
수도이전에 대한 잡상
1. 불문헌법

많은 사람들이 경국대전을 근거로 들었다고 해서 노비, 남녀차별등도 정당하다는 식의 어휘를 구사하는 걸 즐기는 것 같습니다만... 그런 문제는 이미 성문화된 헌법에 의해서 제제당하고 있는 행위들입니다. 불문헌법이란 모든 헌법의 위에 존재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닙니다. 과거로 부터 있어왔고, 굳이 표기하지 않아도 '당연히' 어떻다라는 대답이 나오는, 매우 한정된 측면에서만 제한가능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즉 헌법재판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라는 것입니다. 헌법은 법의 연역적 체계에서 모든 법의 준거가 되는 최고규범이고 그에 따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헌법재판소이지만,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헌법들에 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불문헌법도 그 테두리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지요.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이다.. 이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자주 나온 논리이지만, 그렇다면 국가의 국어를 한글에서 영어로 바꾸는 입법을 추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건 어떻게 반응하실 겁니까? 이것도 대통령이 원하면 바꿀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수도를 바꿀 수 없게 만드는 원천봉쇄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바꿀 수 있습니다. 헌법개정절차를 밟아서 바꾸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건 왜 싫습니까?:-)

위대하신 지도자이신 노무현 대통령의 '천도'라는 거룩한 역사가 한나라당이라는 수구보수반동의 딴지에 성립되지 않을까봐 두려운 것입니까. 목소리 크다고 자신들이 세상을 다 가졌다고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ㅋㅋ

이리저리 비약해서 웃겨보는 건 재미는 있습니다만... 글쎄요.


2. 헌법재판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게.. 헌재는 '정치적', '사회적'인 요인으로 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자, 일어나지도 않는 일입니다. 즉 권력자의 외압및 정치적 당파싸움에 대해서 편항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지 귀막고 눈 막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헌법만 파먹다가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란 것이지요.

헌법자체가 이미 정치성을 띄고 있고, 그 해석을 맡은 헌법재판소도 당연히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왜? 헌법은 연역적 법체계의 최상위에 위치해 있으니까요. 즉 이 법의 정당과 부당을 판결해 줄 '더 높은 수준의'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법은 어디서 그 '준거'를 찾아야 합니까? 당연히 사회입니다. 사회적 공감대(매우 아리송한 이야기이지만.), 역사적 진보, 그리고 현재 상황의 인식을 통해서 그 헌법의 정당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은 조항대로 읽어내려가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석'이라는 것이 필요하고, 그 해석에는 엄연히 그 해석을 맡은 존재(판사, 고등법원 판사, 대법원 판사, 심지어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도.)의 주관적인 결정이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관적인 결정을 최대한 객관성을 띄게 하기 위해, 우리는 9명의 헌법재판관을 두고 있고 그중 6명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게다가 9명을 뽑을때는 국회에서 3명, 대통령령으로 3명, 대법원장에 의해 3명이 지명됩니다. 또한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선 국민투표가 필요하구요.

이게 바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객관성입니다. 이 이상은 모두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의 '자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사는 거 뭐 별 다른 거 없습니다..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면서 어찌 사람이 만든 피조물인 법체계는 그 무엇에 흔들리지 않는 '완전성'을 획득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3. 행정수도 이전

원래부터 돈지랄이라고 생각했고.. 이전한다고 해서 수도 인구가 1/4이라도 줄 것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왜?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라서, 정부기관의 이전이 '서울의 인구'를 '충남'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그 어떤 인센티브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성이 본사를 서울에서 공주로 옮긴답니까? 현대? lg는?

사람이 모이는 것은 '경제적 요인'입니다. 뭐 물론 그런 기업들의 이전을 강제로 종용할 수 없는 일이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자!'라는 심정에 수도이전을 생각한 것 같지만... 그렇게 돈지랄 해서 얻을 수 있는게 도대체 뭡니까.

45조... 아니 솔직히 적어도 100조는 때려잡아야 할 겁니다. 그 100조를 좀 더 의미있는 곳에 투자하는 게 저는 백배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포스트를 올려봅지요:) 아무튼 개인적으로 수도이전은 반대합니다.

왜? 돈이 많이 들어서요. 돈 들은 것에 비해 그 효과는 보잘 것 없을 것 같아서요.





by donzox | 2004/10/24 11:20 | 잡설(雜說) | 트랙백 | 덧글(1)
반고급문화론(反高級文化論) -1
반고급문화론(反高級文化論) - 1



1.

요즘 신화의 에릭씨가 브레이크 뉴스의 조모 시민기자라는 분과 한판 붙었다고 언론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브레이크 뉴스의 변모 편집국장과 조모 시민기자가 재반박글을 올렸고, 그러자 거기에 대해서 브레이크 뉴스 내의 다른 두 명의 시민기자가 변모 편집국장과 조모 시민기자를 비판하는, 아주 희안한 형태의 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제 스타일대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신화의 에릭씨의 말에 공감합니다.

2.

아무도 거북이가 토끼만큼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거북이를 병신취급하진 않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장자가 말했듯,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해서 잘라주면 학은 슬퍼할 것이고..(슬퍼만 하겠습니까만..;;) 오리가 다리가 짧다고 길게 만들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신화가 대중가수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억지로 ‘뮤지션’으로 변신시켜야 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노래부르길 좋아하면, 혹은 노래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을 모두 ‘뮤지션’으로 변신시켜야 하는 이유를 ‘단 한가지’라도 찾아보려고 해도, 그럴 이유는 아무래도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뮤지션’이란, 자기만의 독창성을 지니고, 또한 사회로부터 어느정도 인정받은 음악의 형식과 격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나가는 사람으로 정의해보겠습니다.)

가수는 가수입니다. 왜 그들에게 ‘씽어송 라이터’의 기질, 혹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라는 압박을 가해야 합니까. 그냥 부르고 싶어서 부르고, 팬들의 성화를 받고 싶어서 부르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싶어서 부르고... 그냥 멋져 보여서도 부르고.
작곡가, 작사가라는 사람들이 따로 활동하는데도 불구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인 가수에게 왜 이런저런 태클이 들어오는지 저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한 번 되물어 보십시다. 여러분이 전공하시는 과목들이 있을 것입니다. 상경,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등등.
위와 같은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왜 그 전공분야에서 ‘나만의 이론체계’를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까..? 물론 졸업논문이다 석사논문이다 뭐다 하고 적기는 적습니다만, 거기서 제대로 된 이론을 발견하기란..지난한 일입니다. 뭐 썼다고 해도 한 일이년 지나면 모두 잊어먹어버리죠..ㅎㅎㅎ;
만약 제대로 된 이론이 발견되었다고 생각해보더라도, 그 수는 아주 작습니다. 엄격한 검증과정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 탈락되거나, 있어도 별 중요성이나 유용성은 없다고 판명되지요.
하지만 우리는 각각 대학을 졸업했다는 졸업장을 받고, 자신만의 이론체계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이미 전문가, 혹은 학자들이 만들어놓은 각 전공분야의 지식을 활용하고, 그걸로 밥벌어먹고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선 그런 전공분야의 지식들을 왜 사용하십니까? 혹은 왜 그것들을 돈을 위해 사용하십니까? 그 지식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시지 않구요. 진리를 캐기위해 살아가시지 않구요. 그러면서도 그 학문을 제대로 배웠다고 하실 수 있으십니까? 부끄럽지 않으세요?: )

3.

혹자는 이런 비교를 무의미하다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술과 학문이라는 것은, 지향점이 다르고 접근방식을 달리해야한다구요. 학문은 과거의 지식을 배워서 활용하는 것이지만, 예술은 과거의 지식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라구요.

하지만 저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세계는 감정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거론하면서, 자신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이성은 무시하는 것일까요?
만약 예술을 자신의 내면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학문도 당연히 예술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들은 모두 어떤 사람의 내적공간속에서, 추상적인 관념들을 결집시켜, 그 연결관계를 탐색하고, 그 인과관계를 분석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예술품’입니다.
왜 시인이나 음악가에게만 영감이 떠오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학자에게도 영감은 중요합니다.. 순간의 번뜩임과 아이디어는 모든 창조의 핵심이지요.

다시 돌아와서... 즉 중요한 것은 예술과 학문의 차이점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지식을 이용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영감을 부여하여 새로운 창조를 한다는 것은 예술이나 학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역시 ‘자신만의 영감’을 부여하지 못하고 ‘독창성’없이 그냥 과거의 지식만 써대고 있는 우리를 질책해야 합니다. 우리가 10대 아이돌 스타들을 ‘붕어처럼 입만 끔뻑거린다고’, 혹은 ‘써준 노래만 줄줄 불러댄다고’ 비판하듯 우리는 ‘바보처럼 과거의 공식만 줄줄 왼다고’, 혹은 ‘만들어준 것들만 계속 써댄다고’ 비판받아야 합니다.

4.

다시 처음의 대중음악문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물론 위와 같이 ‘독창성’이 없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사실 가장 큰 비판은 ‘과거의 지식을 습득하지 못했다’라는 점에서 그들 아이돌 스타는 비난받습니다. 대표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락이라 주장하지만, 그 때문에 비판받는 문희준씨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희준씨가 노래하고 창작하는 것들이 ‘락’으로서의 특징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지요.

일리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게 옳다고 볼 수는 없지요:-)

우선 과거의 지식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거의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과거의 지식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란, ‘과학’이라는 이름이 붙는다면 그것이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검증’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즉 현실세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어느정도 타당성을 확보했다고 인정되는, 어떤 특정인의 이론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학이라는 단어를 ‘사회과학’, ‘자연과학’이라는 두개의 큰 분류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즉 ‘과학적 탐구방법’을 통해서 사회와 자연을 분석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과학’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 것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거나 그 검증정도가 약합니다. 주로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두 개의 차이나는 지식, 즉 ‘과학적 지식’과 ‘예술적 지식’이 왜 그렇다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의 존재유무라고 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적 지식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실제로 그 이론대로 현실이 움직이더라’라는 검증과정을 거쳐야 비로서 지식으로 인정이 됩니다. 만약 이론대로 현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혹은 적절한 검증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면? 그것들은 ‘과학적 지식’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가설이라던가 그냥 개개인의 이론으로 끝날 뿐이지요.
즉 과학적 지식은 ‘현실의 작동원리’, 혹은 ‘진실’이라 불리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것을 검증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과학적 지식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술적 지식은? 예술적 지식은 그런 ‘진리’라던가 ‘작동원리’라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니 있더라도, 그것을 검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술은 ‘미(美)’를 이야기합니다.(이것조차도 부정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것이 ‘아름답고’ 어떤 것이 ‘아름답지 않은지’를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있다고 우겨보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 눈앞에 들이대라고 하면 들이대실 수 있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결국 예술은 주관적입니다. 모두가 수긍하는, 절대적 ‘미’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검증할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예술작품을 하나 가져다 놓고 사람들에게 ‘이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물어본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혹은 어떤 음악을 틀어놓고서요. 그래서 사람들의 반응을 통계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처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래서 나온 결과를 보아서 절대적 미를 찾아본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절대적 미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슷한 것이나마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건 바보짓입니다. 60억 인구를 전수조사(census)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다, 모든 예술작품들을 그렇게 검증받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혹여 통계적 추정을 사용해도, 오차는 언제나 존재합니다.(추정의 세계는 확률변수로 다뤄지니까요. 확률변수인 이상, 그것은 언제나 확률적인 의미만을 가지지 거기엔 ‘절대적’이라는 표식을 붙이지는 못합니다.)

이렇듯 예술에는 ‘진리’나 ‘현실’이 없습니다. 물론 과학도 진리나 현실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검증’이라는 과정을 통해 최소한의 현실적합성을 갖추는데 비해, 예술에는 최소한의 현실적합성을 따져볼 ‘현실’이나 ‘진리’라는 것이 없습니다. 즉 ‘미’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반응엔 특정방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풀어서 이야기하면, 무엇이 아름다운지는 모두 제각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5.

여기서 예술적 지식의 한계는 분명해집니다. 과거의 예술적 지식은, 그냥 과거의 예술적 지식,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흔히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냥 ‘해오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술적 지식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적 지식은 그런 진리 따위는 없어야 합니다. 왜? ‘모든 사람들의 미적 기준은 같아야 한다’라는 것은 하나의 주장일뿐, 모든 사람들의 미적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주장이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세계에는 ‘다양성’ 따위는 없습니다. 영감? 그런 건 없습니다. 창조도 없습니다. 오로지 단 하나의 진리만 계속해서 사람들의 미적세계를 지배할 뿐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세계이고, 그 세계를 현실에 구현할 순 없습니다. 다만 폭력과 억압으로 ‘겉으로만’ 따르게 만들 수 있을 뿐.

우리가 모두 미에 대한 기호가 다르고, 그리고 ‘미적 진실’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이라는 것을 덧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란, 그것에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어야 비로소 진실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예술에, 언제부터인가 ‘과거의 미적 지식’을 마치 진실인 양 생각하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물론 제 입장에서. 저의 이 글도 하나의 ‘주장’일 뿐입니다.)

왜, 신이 인간에게 준, 그런 ‘창작의 자유’라는 축복을 하나의 ‘진리’라는 허울로 얽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수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그저 ‘과거의 지식’일 뿐인 것들로 누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 과거의 지식이란 것들은 현실과 비슷하다는 최소한의 증거도 없는데 말입니다.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처럼 과거의 지식들이 ‘미(美)’를 보장한다는 증거 한 톨이라도 한 번 찾아와 내밀어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6.

혹자는 또 ‘미적 공감대’라는 것을 들고 나옵니다. 비록 절대적 진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흔히 말하는 10대 스타, 폭넓게 잡아서 ‘대중문화’는 그런 것들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죄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논의를 시작한 것은 바로 ‘10대 스타’들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즉 ‘대중문화’에 대한 특정전문세력(주로 자신들이 더렵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뮤지션 및 비평가등등)의 비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란 무엇입니까? 대중이 좋아하는 문화입니다. 그렇다면 ‘미적공감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인 대중(大衆)이 선호하는 문화에 대해서 비판하는 자들의 논리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것들이다? 물론 사실일 수 있습니다. 헌데 과거에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도 과거의 ‘대중’이 즐겼던 문화가 아닐까요?(물론 그 ‘대중’은 그것을 즐길만한 여유가 있는 계층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귀족이었겠지요...) 결국 극소수만 즐겼던 그런 문화들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런 문화들이 살아남았다면 오히려 ‘미적공감대’에 대하여 치명적인 반증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미적공감대 운운’하는 것은 상당히 수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미적공감대를 인정하려면 현재의 대중문화도 인정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대중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적공감대라는 것도 없습니다.

좀 더 나아가 볼까요? 만약 미적공감대에 따라서 많은 미적공감대를 얻은 것들만 살아남아야 한다면, 지금 그들이 ‘다양성 운운’하며 지키기를 요구하는 여러 소수문화들은 모조리 싸그리 다 날려버려야 하는, 기이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재밌지요:-)

7.

결국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은, 많은 모순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즉 대중이 그런 문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좀 더 고급문화’를 즐기라고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예술적 ‘진리’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아야 합니다. 만약 그 진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예술적 공감대’라는 논리를 들고 나온다면, 그 예술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 즉 ‘대중문화’를 오히려 예술적 진리라고 인정해야 하는 모순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1부에 대한 보충설명과 대중문화에 대한 또다른 공격, 즉 ‘상업주의와의 결탁’에 대한 반론을 2부에 올려보겠습니다^^/

by donzox | 2004/09/23 22:51 | 트랙백(1) | 덧글(2)
살인에 대한 잡상.

1.

흔히 한 다섯 명쯤 죽이면 신문이나 TV에서 한 번 스리슬쩍 지나치듯 방송해주고 열 명을 넘고서도 못 잡으면 '의문의 연쇄살인!'이라고 조금 비중있게 다뤄준다. 15명 이상이면 전 국민이 불안에 떨고 20명을 넘기면 '희대의...'라는 타이틀이 붙어서 나온다.

무슨 살인 경험치 쌓아서 레벨업하냐? 언론들의 이런 보도를 보면 왠지 어이없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건 언론의 당연한 행동을 괜히 씹어보는 머저리 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기사작위 주듯 변화하는 타이틀을 보면...글쎄.


2.

살인범이 잡히면 모두들 죽일 놈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가 잘못되어서...'라는 말로, 혹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오래된 격언으로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

1)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런 살인마들을 양산할 만한 구조적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그런 구조적 문제점이 존재하는 한 살인마들은 가뭄에 콩나듯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쏟아져 나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왜 유독 몇몇 인간들만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가?

남에게 봉사하고 친절을 베푸는 천사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사회구조와, 살인마들을 만들어 내는 사회구조가 일치한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닌가?

그들은 '구조적' 문제점이라는 것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구조적 문제점이란 '그 누구를 갔다놔도'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외부적, 시스템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 나타나는 살인마들을 '구조적'문제점으로 제기하는 것은.. 글쎄다. 어쩌다 한 번씩 기형아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인간의 임신메커니즘에 기형적 요소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과 별 진배없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임신 메커니즘은 별 문제가 없다. 다만 선천적 유전자와 외부영향이 존재할 뿐.

선천적 유전자를 '인간 본성', 외부영향을 '주변환경'으로 생각해봐도 결론은 비슷하다. 인간은 모든 다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주어지는 주변환경도 다 다르다. 그 모든 것을 똑같이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희대의 살인마나 희대의 천재가 태어날 수 있는 거 아닌가?

혹자는 그 '주변환경'을 건드려본다. 젠장, 그러면 사회라고 뭉뜽그려 말하지 말고 주변환경이라고 포커스를 맞추든가.(사회랑 주변환경은 틀리다는 것은 모두들 아시겠지요^^;)
하지만 역시 그래도 변하는 건 별로 없다. '사회'가 특정한 주변환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도대체 '어떤'사회가 그런 특정한 주변환경을 모두 없엘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주변환경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류사에서 살인마는 '특정사회', '특정시대'를 초월하고 계속해서 등장해왔다. 얼버무리지 말고 그 주변환경이 무언지 한번 '똑바로' 말해보라. 그 특징과 형태, 그리고 그 주변환경 내에서 존재하는 다른 인간들의 행위와 살인마들의 차이점이 나타나는 원인도 함께.

괜히 틈만 나면 사회 탓하고 싶은 요구를 제발 참아달라. 요즘엔 뭐 좀 씹는다고 지식인이라고 말해주진 않는다. 투덜이 스머프 같을 뿐.

2)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매우 옳은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가 지은 '죄' 때문에 그를 사형시키거나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이지 그가 단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못생겨서', '성격이 더러워서', '머리가 나빠서' 미워하지는 않는다.

죄는 사회가 만든 것이고, 그 집행은 사회가 결정한다. 죄인을 벌하는 것은 창조주가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조금 더 편리하기 위해서', '조금 더 안전하기 위해서' 문제를 일으킨 인간들을 격리시키거나 사형시키는 것일 뿐.

그들이 '근원적인' 악이라서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회'라는 집단에 미치는 영향이 좋지 않기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지.

뭐 인생 살다보면 누구를 토막내서 죽이고 싶을 수도 있고, 지하철에 불도 지르고 싶을수도 있고, 산 사람 목도 썰어서 죽일 수도 있고, 비행기를 빌딩에 박고 싶을 수도 있고, 학교에 폭탄 설치하고 인질 잡아보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는 있다. 안 되는게 어딨는가?

다만, 그들은 자신이 한 행위에 책임을 져야한다. 안 지고 싶어도, 사회는 강제로 그들에게 책임을 지울 것이다.

그리고 난 그런 '책임부과'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족과 '사회'라는 곳을 좀더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3.

살인은 죄가 아니다. 법이 승인하는 살인장, 전쟁터에서는 사람을 많이 죽일 수록 영웅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인을 '죄'로 보기 시작한 이상,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얻은 이상, 남겨진자의 슬픔과 아픔을 보고 똑같이 그것을 느끼는 이상.

살인자는 그 책임을 져야 하고, 우리는 그 책임을 지워야 한다.








by donzox | 2004/09/10 00:11 | 잡담(雜談) | 트랙백 | 덧글(3)
나는 꿈을 꾸지 않겠다

나는 꿈을 꾸지 않겠다



모두들 머리위를 쳐다보며 걷는다
그들의 발밑에 파여있는 구덩이는
별을 향한 그대들의 희망을
산산히 부서뜨리기 충분한 무덤인데

빛을 바라보며 모두들 걷는다
등불 아래 스며든 어두운 그림자는
그대들의 발걸음을 채어서 넘어뜨릴
날카로운 돌멩이를 품고서 기다리는데

모두가 바라보는 것들을 보면서
나도 그곳을 꿈꾸고 싶었지만
비겁한 겁쟁이의 두려운 마음은
그곳을 꿈꿀 수 없게 만들었다

비겁한 겁쟁이가 해야하는 일이란
의심과 불신으로 그대들을 이끌어
그대들의 앞길에 널려진 절망들을
똑바로 바라보게 목덜미를 움켜쥐는것

소중히 안고있던 등불을 깨버려서
갑작스런 어둠에 울고있는 그대들을
거칠게 끌어내어 땅위로 내팽겨쳐
스스로 돌멩이를 더듬게 만드는 것

불의(不義)와 이해(利害)에 눈이 먼 겁쟁이는
차가운 마음을 모두에게 심어주어
품고있던 따스한 온정의 마음들을
모두 꺼트리는 악마가 되야한다

나는 꿈을 꾸지 않겠다
그대들을 꿈꾸지 못하게 만든
현실에 가둬 눈물어리게 만든
그 크나큰 죄값 때문에






by donzox | 2004/09/04 23:31 | 저작(著作) | 트랙백 | 덧글(2)
C.L.S 다시 시작하옵니다..^^
방학도 끝나고, 이제 시간도 남으니 글 올릴 시간은 있는 것 같습니다 ㅋㅋ 그 동안 생각해 보았던 것도 많았고... 손가락도 글을 조금씩 그리워 하는 것 같습니다 ㅋㅋ

예, 다시 시작합니다. 자유주의로 향하는 길을...
by donzox | 2004/09/04 23:07 | 잡담(雜談) | 트랙백 | 덧글(0)
일단정지..
아무래도 조금은 잠수를 타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제 홈을 들려주셨던 분들께 송구하옵니다..T.T

한계를 시험하는 과제와 시험의 압박이 지난 뒤엔, 생존을 위한 아르바이트가 기다리고 있어 아마도 이 잠수는 조금 오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신촌 현대백화점에서 수신호 알바 하옵니다^^; 어쩌다 지나시다 보면 골목길에서 '잠시만 멈춰 주십시요~'라고 외치는 저를 보실수 있으실지도^^)

하지만 잠수를 하면 반드시 다시 올라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막히니까요..ㅎㅎ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때는 조금 더 나은 글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_ _)


by donzox | 2004/06/10 23:33 | 잡담(雜談) | 트랙백 | 덧글(7)
학벌론 2
학벌론-2

*저어어어엉 말 오랜만에 업뎃이옵니다..;ㅁ; 통촉하여 주시길^^;


3.

얼마전 서울대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된 적이 있습니다. 민노당에서는 공약으로 내세웠구요. 다 모두 학벌철폐 어쩔시구..하며 이야기 된 것입니다만, 사실 그것은 빈대잡으려 서울 태우려는 격입니다. 왜 민노당이 미국침략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는지는 모르겠군요:)
한 번 반문해 보십시다. 서울대가 왜 서울대입니까? 한국의 대학은 서울대와 서울대가 아닌 곳으로 나뉘는 이유는? 왜 정부고위직에는 다 서울대 출신들이 앉아있을까요?

서울대, 그리고 서울대생들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귀결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시, 행시 합격자 비율을 보면 왜 서울대가 서울대인지를 알 수 있지요.
이렇게 사시, 행시같이 출신대학과는 아무 상관없는, 즉 완벽히 개별 능력만을 평가하는 시험에서도 서울대는 당당히 수위에, 그것도 다른 대학을 압도하는 정도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교수진도 막강하지요... 이공계를 본다면, 최근 SCI논문 피인용횟수가 1000회를 넘긴 교수가 16명으로, 국내에선 가장 많습니다. 그 뒤를 카이스트, 포공이 잇고 있고.. SCI에 논문을 올린 횟수도 서울대가 가장 많습니다. 중앙일보의 ‘전국대학평가’에서도 서울대는 언제나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요.

왜 이렇게 제가 서울대를 추켜올려 줄까요? 아닙니다. 저는 추켜올려주는게 아니라... 잘난 놈들을 잘났다고 하는 것 뿐입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서울대는 서울대입니다.

즉, 서울대이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게 아니라, 그만한 이유가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서울대라는 이름이 빛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능력은 앞서 설명한 두 가지 이론처럼 ‘서울대의 교육과정이 뛰어나서’그런 것일수도, 혹은 ‘서울대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능력이 원래 뛰어나서’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는 아마 두 가지 요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듯 합니다.
서울대가 막 무너지기 시작하면 서울대는 더 이상 서울대가 아닙니다. 그 타이틀은 서울대를 누르고 올라서기 시작한 대학의 것이지요. 연고대면 연고대, 서성한이면 서성한, 삼국대면 삼국대, 경희대면 경희, 홍대면 홍대, 부산대면 부산대, 경성대면 경성대... 언제나 넘버 원의 자리는 존재하고, 그것을 서울대가 꾸준히 유지해 왔다는 것일 뿐입니다.

물론, 서울대가 잘났다고 해서 모든 서울대생이 잘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서울대 생들이 대체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눈앞의 서울대 생이 대체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일까요? 그것은 게다가 ‘확정’이 아닌, ‘기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면, 퇴출당하는 것. 그 뿐입니다. 다만 그 와중에서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겠지요. 그게 매우 불합리하고 비이성적, 혹은 잘못된 것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취업자 개개인 자신들만의 생각일 뿐, 그들을 고용하려는 기업의 입장은 다릅니다. 기업은 다다익선, 즉 지원자의 여러 특성 중 좋은 게 많으면 많을 수록 더욱 좋은 것이고, 그 때문에 학벌도 좋고 성적도 좋고 토익도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학벌 안 좋지만 성적 좋고, 토익 좋은 사람을 뽑는 것 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입니다.(경제학에선 강단조성(Strong Monotonicity), 즉 다다익선의 논리를 통한 무차별곡선으로 소비자이론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합리성과 연결되구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서울대가 이런 가시적인 성과를 계속 내보이는 한, 다른 대학들이 서울대를 앞지를 수 없는 한 서울대는 언제나 한국의 최고대학으로 인정될 것이고, 그 대학에 속한 학생들은 ‘단지 서울대’라는 이유만으로 최고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본질이 뽀록나지 않는 한.



5.

만약, 여러분이, 매우 잘나고 멋지고 예쁘고.. 아무튼 다방면에서 ‘짱’이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래서 따라다니는 사람이 구름같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혼을 해야 합니다. 배우자를 골라야 하는데, 최측근들을 살펴보니 별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모하고 쫓아다니는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그 중에 한 명을 뽑는다 생각해 보십시다.
문제는 시간과 비용 때문에 그 모든 배우자감을 만나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배우자를 뽑을 것입니까? 우선 ‘서류심사’를 통해 재력, 배경, 학벌, 외모 같은 것들을 따져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들이 여러분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요? 과연 이 사람이 내 생애에서 다시 없을 최고의 배우자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골라보는 것이고, 그럴 가능성을 높여주는 여러 사항들을 점검해 보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이것을 하지 않고 S.R.S(Simple Random Sampling:무작위 추출)로 하나 뽑아버려 결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런 경우는 갑자기 여러분이 반쯤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일정수준 이상 되어서 도저히 판가름 하기 힘들다’라는 결론을 내린 후에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그렇게 따져봅니까? 왜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하고, 설사 아주주주주주주 dfj%;$13jq29i41한(...) 사람한테도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왜 그러지 않습니까? 왜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못생긴 이성은 마다하고, 잘생기고 능력좋은 사람을 고릅니까?
결국, 내가 좋아야 고르는 것입니다. 즉 기준은, ‘내 맘에 들고 안들고’입니다. 누가 사회적 형평성을 이유로 ‘못생긴, 능력없는 사람에게도 기회를 달라!’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KIN~

두 이야기를 한 번 합쳐볼까요?

‘내가 배우자를 고르는 것은 바로 나의 기준, 내 맘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에 따르는 미래의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미래의 책임을 최대한 줄이고 최적의 선택을 하기 위해, 나는 날 만족시켜줄 것이라 기대되는 여러 지표들로 내 배우자들을 재단하며, 그 지표를 통해 훗날 내 만족도를 유추해본다.’

그런데 왜 기업은 이러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기업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까? 그런 룰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그런건 없습니다. 다만 기업은 자사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서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일 뿐이지요.(Social Marketing) 만약 기업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사회적 책임을 지니고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이런 책임을 위반한 것입니까?
허나 그런 논리는 허무맹랑한 원죄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린 모두 죄인입니다. 다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의 죄를 우리는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어찌 해야한다. 그래야 죄를 씻을 수 있다.’

...이런 말 듣고 싶으신지요-_-;;

결국 기업은 자기 좋을대로 사람을 뽑을 권리가 있고, 그 권리가 만약 기업에게 최적해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비판할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망하면 자기 책임이니까요. 하지만 기업도 자신이 망하는(법인의 관점에서.)짓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좋은 인재들을 긁어모으려고 발악합니다.
즉, 자신들의 뚜렷한 기준이 존재하고 그 기준대로 사람들을 뽑아서 지금 성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볼 근거는 과연 무엇입니까? 삼성이 사람들을 골고루 뽑지 않아서 망하던가요?:)

즉, 기업은 좋을대로 뽑을 권리가 있고, 그렇게 뽑아서 성공하고 있습니다. 학벌을 따짐으로서 좋은 인재들을 매장시키고 있다는 논리는, 만약 학벌을 따지지 않거나 아예 비명문대 출신으로 이뤄진 사람들로만 이뤄진 기업이, 학벌을 따지는 기업보다 ‘뛰어나게 우월한’ 성과를 보이고, 그것이 일반화 될 정도로 보편화된다면 정당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던가요?

6.

기업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을 뽑을까요? 여러 가지를 봅니다만, 그 중에서도 학벌은 필수요소입니다.
하지만, 학벌이 모든 것을 결정하진 않습니다. 대기업의 인사관행은 우선 spec을 위시로 한 서류전형에서 컷라인 이하의 사람들은 모조리 짤라내고(학교, 학점, TOEIC같은 외국어능력, CPA와 같은 공인인증서, 기타 수상경력) 그 서류전형을 통과한 사람들을 면접을 통해 뽑습니다.
즉, 그 컷라인 이상에만 든다면 더 이상 서울대라는 배경을 활용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컷라인’이라는 것이지요. 그 컷라인을 늘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구름같이 몰려든 지원자들을 모두 면접할 수 있을까요? 힘들 것입니다.

즉 컷라인은 일면 어떤 절대적인 가치로 매겨지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게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로 매겨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개인의 여러 가지 요소를 평가하여 학교에서 상대평가하듯 가장 나은 놈들 A주고 그다음 B, 그 다음 C, 그 다음 D로 놓았을 때 기업이 결정할 것은 지금 뽑으려는 인원과 그 성적군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A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충분히 뽑으려는 인원을 뽑을 수 있으면 B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C, D는 물론이구요.
만약 A를 받은 사람들이 미달된다면? 당연히 B에게도 기회가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에, 기업은 A가 될 수 있는 요건, 즉 컷라인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이런 논리는 중소기업을 보면 명확해집니다. 중소기업이 컷라인을 제시할 때, 왜 잘 나가는 대기업보다 낮은 컷라인을 가질까요? 그것은 이미 A는 대기업들이 독식하고, 나머지 B나 C, D의 인재들을 뽑아야 하기 때문에 컷라인은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중소기업이 A급의 인재를 뽑고 싶다고 해서 뽑을 수 있을까요? 그러러면 대기업에 버금가는 혜택, 아니 그 이상의 혜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미 그 기업은 중소기업이라 보기 힘들지요:)

즉 사람들이 학벌 때문에 취직못한다고 투덜대는 것은, 어찌보면 황당스런 소리라는 것입니다. 한 번 반문해 보십시요. 내가 과연 서울대생 보다 확실히 기업에 득이 되는 인재라는 것을 주장할 만한 것이 있는가? 저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에, 저는 다른 방법으로 그런 핸디캡을 만회하려 합니다. 즉 고등학교 공부는 서울대생보다 못했지만, 뭔가 기업활동에 도움될 다른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고 홍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그런 하등의 활동을 하지 않고 그저 남들 하는대로의 스펙만 맞춘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서울대생들이나 기타 명문대생들에게 밀릴 것은 뻔한 일입니다. 물론 제가 만약 A랭크에 들어간다면, 그런 걱정을 하지 않고 면접에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만약 제가 A랭크 안에 못 들어간다면?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선택당하는 문제입니다. 즉 여러분들이 선택하는게 아니라, 선택 당하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선택하는 입장이 되려면? 그것은 기업들이 여러분을 모셔오고 싶어 안달날 수준의 상황에서는 여러분이 선택자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선택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열장에 놓인 상품처럼요.
허나 이것을 가지고 비인간화 어쩌구 하는 것은 솔직히 어이없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기업에 취직하려는 게 아닌, 다른 문제로 그 기업과 상대하는 일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기업에게 꿀릴 게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소비자(그것도 피해받은)로 등장하고, 이거 인터넷에 뿌린다고 윽박지르면 기업은 여러분 앞에서 굽신굽신 거릴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돈을 벌고 싶고, 그리고 그 기업을 택했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기업의 검증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설사 그게 매우 모욕적이고, 존심상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그 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면, 참아야 합니다.(물론 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사실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_-;; 기업이 사람뽑는데 알몸검사를 하던가요?)

자기가 누군가에게서 돈을 받으려면, 그 누군가의 기준에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기준에 그 누군가의 뜻을 맞추려 하지 말구요. 역시 마찬가지로 시험치고 나서 자기는 맞다고 생각하는데 교수님이 합당한 이유를 들어 틀렸다고 하면, 틀린겁니다.

이것입니다. 즉 ‘뭔가를 남에게 얻고 싶다면, 그만큼의 댓가를 그에게 지불하라.’ 이것이 바로 저의 신조이자, 자유주의의 근간이 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 회사에 취직하여 돈을 벌고 싶다면, 그만큼의 만족감을 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만족감을 서울대 생보다 주지 못할 것이라고 ‘기대’될때, 저는 그 기대를 수정시키기 위해 오만짓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싫으면, 그 회사에 취직을 ‘안하면’됩니다.

7.

정리해보겠습니다.

1) ‘좋은 학벌=좋은 인재’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으나, 대략적으로 그런 관계가 성립하는 편이다.
2) 허나 만약 학벌이 개인의 능력을 반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모든 지원자의 개별
능력은 베일에 가려진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벌은 높은 능력에 관한 ‘기대치’로서
작용할 수 있는 몇가지 특성이 존재한다.(지능, 성실성, 교육수준)
3) 만약 기업이 사람이 크게 부족하다면, 학벌이 나빠도 기업에 취직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에 비해 기업이 크게 부족(좋은 회사환경을 가진)하기에, 개개별 취업자는
선택 당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4) 그런 선택과정에서 비록 선의의 피해자(즉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학벌 때문에 선
택되지 못한)가 생겨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한계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학벌외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공모전 입상, 경시대회, 인턴제도 등등) 을 따로 마련하고, 그것을 입사기준으로 채택함으로서 그런 불합리함을 줄일 수 있다.
5) 그러나 겉만 보고 ‘학벌 때문에 사회가 병든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몰상식한 진단일 뿐
이다. 왜? 서울대는 실제로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서 있을 뿐 ‘서울대’라는 이름으로만 지금 최고의 자리를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최고를 없에자!’라는 목적이라면, 똑같은 논리로 ‘최저를 없에자!’라는 것이 성립
하게 된다. 그 두가지의 결과가 동시에 나타난 것은 2차대전때 나치의 유태인, 집시 학 살이다.
6) 기업은 자신들 입맛에 맞는 인재를 고를 권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권리는 비판당할
수 없다. 왜? 인재를 잘못 뽑아서 생기는 모든 불이익은 기업이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 에.


몇 가지 못다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이만 글을 줄일까 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보충해 보도록 하겠사옵니다(_ _)

by donzox | 2004/05/01 01:10 | 잡론(雜論) | 트랙백(1) | 덧글(7)
선거에 대한 잡담-2
이미 선거도 끝났고.. 투표율도 높아지고 구도도 어느정도 안정적으로 돌아갈 기세라 이모저모 나쁘지 않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야기를 또 꺼내는 것은 사자(死子)의 화란(火卵) 만지기(...)일 것 같으나, 확실히 이건 좀 토의를 해봐야 할 주제인 듯 하여..^^;

우선, 기권자가 정부 욕한다해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걸 신경쓰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며, 심각한 미풍양속을 해치는 도덕적 범죄행위가 되지도 않지요. 그냥 '나 투표했어'라고 거짓부렁 쳐 버리면 그나마도 모조리 필요없게 되어 버립니다.

허나, 개념상&논리상으로는 좀 그렇지 않은 듯 합니다. 저는 그런 사회적 통념('기권자는 정권을 욕할 권리가 없다')에 대해 허접한 반박을 좀 해보겠사옵니다..^^

1. 설문지 작성 원칙

좀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많은 분들이 설문을 받으시거나 설문지를 작성해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외모가 떨어지는 이성/동성이 건네준 설문지는 한 3page정도 되더라도 즐~ 외모가 받쳐주는 이성/동성이 건네준 설문지는 300page라도 히... 이런 빌어먹을 외모 지상주의.. 투덜투덜(...)

자자, 이야기를 삼천포에서 건져내어 다시 끌고나가 봅시다. 혹여 학교에서 마케팅을 들어보신 분들이라면, 마케팅 리서치(Marketing Research) 부분에서 조금 배우실 터인데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못 들어보신 분들을 위해서 약간만 적어보자면..

1) 최대한 쉽게 - 질문자의 의도를 설문자가 100%파악하고 대답할 수 있게
2) 겹치지 않게 - 설문의 답이 서로 겹치지 않게.

'20살 이상 30살 이하, 30살 이상 40살 이하...30살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한단 말인가~!!!'

..같은 KIN~ 스러운 짓을 하면 응답자는 대략 낭패스러우니까요-0-;

3) 가능한한 모든 대안이 나타나게 - 대답을 하려도, 대답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열심히 시험치는데 어떤 문제의 답이 3번인데, 3번이 없다.. 그럼 뭐 잘못된 문제겠지.. 하며 넘어가버리지요. 설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응답자가 대답이 가능한 모든 대안을 제시하여, 그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4) 순서에 주의 - 세상만사 귀찮으면 설문은 얼마나 더 귀찮겠습니까. 그냥 3, 아니면 4번에 주르르륵 올인! 안 그러면 랜덤으로 이리 저리 찍어넣어 보십시다. 아 재밌다...

..허나 그 자료는 이미 '쓰레기'입니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설문지라면 똑같은 질문이나 형식을 바꿔 응답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항을 집어 넣지요. 설문 하시다 보면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문제는 응답자가 알아차릴 정도면 좀..-_-;)

제가 아는 건 없이 나불거리기만 좋아해서 이 정도 밖에 말씀드릴수가..흑T.- 아무튼 이 네가지 정도의 원칙은 기본으로 지켜 줘야 적어도 '설문구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2. 흑백논리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3번, 즉 '선택가능한 모든 대안을 제시'라는 부분입니다. 물론 여기서 선택가능한 모든 대안이라는 것은 질문하고자 하는 상황에 관계된 것이어야 하겠지요. 만약 잘못된 질문, 혹은 의도성을 가진 질문이라면 선택지에는 모든 대안이 제시되지 않고 단 몇가지 형식적인, 아니면 의도된 질문만 나열하게 될 것입니다.

레드진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북침론'을 예로 들어 보지요. 국민에게 북침에 대한 설문을 돌린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두 단체가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수호를 위한 NGO>

Q: 당신은 북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1) 조금 위험하지만, 해볼만하다
2) 별로 위험하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한다
3) 나를 빨갱이 때려잡는 선봉장으로 세워 달라

<반미자주를 위한 시민연대>

Q: 당신은 북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1) 너무 피해가 크므로 해선 안된다.
2)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위험한 생각이다.
3) 북침을 주장한 녀석들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친미매국노이다.

어린아이라도 이런 설문의 문제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대답이라는 게 모두 한 쪽의 의견만 제시되어 있지요. 물론 쉽게 설명해드리기 위해 극단적인 예를 썼습니다만,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교묘하게 설문을 조작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이들 그러구요.(설문조사는 왠만하면 믿지 마세요..^^;)

이것은 흑백논리와 어느정도 유사성을 가집니다. A아니면 B, 혹은 A나 B만 강요하는. 즉 중간자적 입장이나 양비론적 입장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거냐, 아니면 저거냐. 너에겐 선택의 자유가 둘 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다. 아무리 싫더라도, 너는 둘 중 하나를 뽑아야 한다. 길은 그것밖에 없다.

누누히 말씀드렸지만, '개인의 선택의 폭을 최대한 확장'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유주의자입니다. 이런 논리엔 당연히 동의하기가 힘들지요.
그럼 무엇이 저런 상황을 타개시켜 줄까요? 바로 기권(棄權)입니다.

3. 기권론

왜 우리는 '기권'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을까요? 오라는데 안 와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괜히 사람 오라가라하면 말하는 사람도 피곤해지니까요.
허나, 그런 단순한 이유 외에도 기권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집니다.

1) 현재 제시된 대안 들 중 맘에 드는 게 없을 때, 그런 상황에서 강제적인 의견 수렴(흑이냐 백이냐? 좌냐 우냐? 빨갱이냐 친미매국노냐?)을 회피하기 위한 '유.일.한'방법이 될 수 있음.

2) 흔히 말하는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면 그 투표는 무효임. 그 뜻은 바로 기권율은 '국민 전체의 민의를 반영했느냐 반영하지 않았느냐?'를 알아볼 수 있는 바로미터임. 즉 80%의 참가에 80%의 지지를 받은 후보와.. 51%의 참가에 51%지지를 받은 후보와는 엄격한 차이가 있음.

만약 기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도대체 왜 '정족수'라는 것을 만드는 것입니까? 그냥 온 인원끼리 샤바샤바해서 정해버리면 되지요.

..개인적으로 주사파들이 설치는 대학의 학생총회 성립기준을 '재학인원의 2/3이상의 참가에 2/3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면 탈락'이라고 기준을 높이고 싶습니다만.. 일단 이 문제는 보류.(-0-;)

3) 기권자가 정권을 비판할 수 없다는 논리는, 즉 어떤 의사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 결정상황에 대해 논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됨.
허.나. 기권도 하나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면? 만약 그런 기권의 권리가 지금까지 허용되지 않았다면?

3번에 관련하여, 만약 투표용지에 당당히 '기권'이라는 란이 정해져 있었다면 저는 투표했을 겁니다. 기권란에 찍었겠지요. 허나 지금의 상황은 '기권자'와 '귀차니스트'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기권'을 선택한 사람들은 마치 귀차니스트와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하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추가하여, 최대한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그래야 실질적 의미를 가릴 수 있으며.. 그들이 결코 권리행사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권리행사를 했으되, 다만 제3의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

투표는 단순히 누군가를 뽑는 것 이상의 무엇을 나타냅니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나타낼 수 있는 여론의 장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투표권을, 제가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어떤 사회적 기생충의 입에서 '저를 지지해 주신 유권자 여러분 감사합니다~'의 '유권자'가 되는데 쓰고 싶진 않습니다. 그건 제 의지를 완전히 역행하는 일이자, 저의 의지를 말살&왜곡한 하나의 범죄입니다. 그런 범죄를 당한 '피해자'한테, 어찌 저의 의지를 말살한 사회적 기생충을 비난할 권리마저 박탈하려는지요? 우는 아이 뺨 때리는 격 아닙니까.

4. 결론

..너무 심각했지요^^; 허나,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논리'적 영역에까지 들어가면 저는 저렇게 말할 것입니다. 뭐 현실에서야 정치인들 씹고 씹고 또 씹어도 별 문제는 없지만 말이지요^^;

어떤 '불가피한'상황을 강요해놓고, 그 의지를 마음대로 이용한다는 것.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면 저도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을 하겠지요.
그러나.. 현실을 눈꼽만큼도 고려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면 이뤄진다!'라는 착각에 휩싸인 사람들이 세상에 한 가득 있는 마당에... 저라고 입 가만히 놔둘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그렇기에, 기권자는 정권을 욕하면 안된다는 논리에 반대합니다.





















by donzox | 2004/04/16 22:49 | 잡담(雜談) | 트랙백 | 덧글(4)
투표에 관한 잡담.

1.

이번 총선에서 저는 부재자 투표용지를 '받을'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저는 역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념적 스펙트럼으로는 한나라 당이나, 그쪽은 저와 '이념적 스펙트럼'과 같을 뿐이지 전혀 옹호해 주고 싶지 않은 쪽입니다. 제가 열우당이나 민노당을 찍을리도 만무하구요.

저는 투표를 통해 한 개인의 선거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이자 의무이다'라고 하지만, 의무라면 아예 불참을 허용할 수 없지요. 우리나라 3대 의무 중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있는지요? 즉 납세, 교육, 국방의 의무(근로의 의무는 뺐습니다. 이것도 의무라고 보긴 힘드니까요.)중 그 어떤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거부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즉 투표권은 권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하지만 슬슬 분위기가 '강요'에 가깝게 흘러가고 있는 듯 하여 안타깝습니다.

혹 어떤 분은 '그렇다면 너는 정치를 욕할 권리가 없다~!'라고 하시지만, 그건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1)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를 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귀여니 책을 안 읽고 귀여니를 욕할 권리가 없다는 말과 별반 다를 거 없습니다. 하지만 욕하잖습니까? 그걸 비판하면 '우리는 책을 보지 않아도 귀여니를 비판할 권리가 있다~'라고 하시지요:)

2) 물론 위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면, 저는 잘못된 행위를 예시로 들어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는 태도가 되겠지요. 허나, 문제는 저런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근거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집행과정, 또는 결정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면(기권) 그 결정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에 대해 비판할 수 없다는 논리에 저는 동조할 수 없습니다. 왜?

A)그건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배제'된 것이지 '행사하지 않은'것이라고 보기엔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이건 마치 '너는 얼마나 x같은 놈들을 뽑을래?'라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저에게는 모든 정치인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거든요.(그나마 좀더 깨끗한 놈을 찍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논리는 저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저는 정치인의 평가를 '투명성'으로 결정짓지 않거든요.)

뭐하러 괜히 시간내서 그런 쓸데없는 짓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게 과연 '행사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역선택의 모순을 줄이려는 시도이지요.
즉 선택할 수 있는 선택항 중 내가 원하는 선택항이 없다. 그렇다면 기권도 또한 하나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실질적 의미입니다.

약간 다르지만, 설문지 작성의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는 바로 '응답자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항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다면 그 설문은 잘못된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응답자가 응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설문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건 설문지 작성자가 병신인 경우입니다.

B) 또한 그런 논리를 공식적으로 법제화하거나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인 증거나 상황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마음껏 욕해도, 사회로부터 제제나 모두가 동의한 공식적인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건 형식적 의미입니다.

즉, 투표를 하지 않음으로서 저는 어떤 죄를 저지르지도, 또한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할 행위를 한 것도 아닙니다. 법은 '하지말라'의 영역이지, '하라'의 영역은 아니거든요. 그 외에는 모든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유를 누리는 게 왜 비판받아야 할까요?

2.

더군다나, 저는 별로 정치를 욕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태생적으로 '사회적 기생충(Social Parasite)'적인 성격을 띄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저는 '그러려니~'합니다.
이게 정치에 무관심한 걸까요? 우민화 정책에 길들여진 걸까요? 아닙니다. '정치'의 한계를 저는 개인적인 기준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그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를 기대하지 않는 것 뿐이지요. 물론 이건 자유주의적 사고가 강합니다만:)

아무튼, 투표를 '강요'하는 행위는 기권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고입니다. 기권(棄權)도 하나의 권리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앞서 말한 것 처럼 의무화하여 그에 따른 불이익을 제공하던지요.

그런 기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뭘까요? 음모론적으로 해석해 볼까요?

'너희들이 선거를 하지 않아서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당선되지 않는 것이다. 선거를 해라. 하되, 내가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해라.'

물론 이건 망상입니다. 하지만 요즘들어 이런 생각이 망상이 아니라.. 점점 구체화되어가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탄핵심판, 국가를 망친 주범들을 벌하자, 저들을 벌하지 않고 훗날 자식에게 도대체 뭐라 말하겠는가?, 차떼기를 벌하자 등등.
이대로 가다간 한국 보수는 절멸한다, 보수를 지키자, 균형과 견제를 등등.

즉, 여론이 양극화되면서 그 주변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를 정치인들만 하면야 원래 그러려니 합니다만, 일상생활에서도 무수히 이런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마냥 순수한 의도에서라고 단정짓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1) '내가 원하는 정당이 집권하는 것', '국민들이 투표에 많이 참가하도록 하는 것'. 이 두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지만 왜, 도대체 왜 국민들이 투표에 많이 참여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그건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이유는? 남의 기권은 나의 불행입니까? 아닙니다.

2) 결국 투표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주로 '정치권을 개혁하자'라는 소리로 집결됩니다. 즉 '정치권을 개혁하려면, 너희 기권층들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투표해라'.

결국 첫번째 논리입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정당이 집권하는 것'과 '정치권을 개혁하는 것'에는 갭이 있습니다만, 자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요: )

3.

논리가 좀 억지스럽다고 하셔도, 저는 충분히 수긍합니다. 허나, 사회가 '강요'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기권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그걸 인지해야 한다고 전 주장합니다.
















by donzox | 2004/04/14 20:35 | 잡담(雜談)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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